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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년(태종 18년) : 연산에서 출생하신 후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시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連山庄幼學射), 성년이 되어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출중하셨으며, 특히 지략과 궁술 등 무예가 탁월하여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호위하는
친위부대인 내금위(內禁衛)의 채용시험에 합격 내금위 소속 무관으로 벼슬에 오르심(旣冠屬內禁衛)(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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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6년(세종 18년) : 내금위(內禁衛) 재임 중 무관을 채용하는 과거시험인 무갑과(武甲科)에
급제하시어, 돈용교위(敦勇校尉:정6품상)로 승진 당시에 중앙군사조직의 중추였던
5위(五衛:前?後?左?右?中衛)중에서 전위(前衛)를 맡았던 충좌위(忠佐衛)의 행 부사맹(副司猛)을
지내심(平胡公年譜.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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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년(세종 20년) : 무예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무관으로 채용하고 종3품 이하인
무관에게 승진을 시키기 위한 시험인 도시(都試)에 1등 하여 충의교위(忠毅校尉:정5품하)로
승진 행 훈련원 참군(參軍)이 되심.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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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년(세종 22년) : 도시(都試)에 1등 하여 과의교위(果毅校尉:정5품상)로
승진, 무과나 도시 등을 통한 무관의 채용과 군사 훈련 등을 담당하는 관청인 훈련원에서
주부(主簿)를 지내심. (平胡公年譜,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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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년(세종 29년) 8월 20일 과거급제 후 10년이 지난 관료에게 격려의 의미로
시행하던 일종의 승진 시험인 중시(重試)에 장원하시고(국조인물고, 평호공년보), 선략장군(宣略將軍:종4품하)에
오르시어 행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셨으며(평호공년보), 12월 16일 조산대부(朝散大夫:종4품상)로
승진 행길주판관(吉州判官)으로 나가 재임 중 정치를 잘하여 많은 치적을 쌓으신 것이 인정되어
(平胡公年譜,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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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년(세종 30년) 3월 25일 : 봉정대부(奉正大夫:정4품상)로 승진하시고 병기
등 군수물자의 제조와 관리를 맡아보던 군기시(軍器寺)의 최고 책임자 다음의 벼슬인
부정(副正)을 지내셨음. (平胡公年譜,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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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세조 원년) 12월 27일 : 판관(判官:소속미상) 재임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훈(策勳)되시어 1자급(一資級)을 가하고, 자식은
음직(蔭職)을 주고 후세까지 사유(赦宥:지은 죄(平胡公年譜, 國朝人物考)를 용서받는 것)하는
특혜를 받으심. (世祖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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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세조 3년) : 지방사정 및 관리들의 잘잘못을 조사?처리하고 임금께 보고하는
함길도 채방사(採訪使)로 나아가 매사를 성실하고 올바르게 처리함으로써 함길도 지방을 편안케
하고 돌아 와(국조인물고), 임금의 가상(嘉賞)을 받으시고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상)이 되어
한 지역의 군권(軍權)을 총괄하고 소속된 제진(諸鎭)을 통솔하면서 지방수령까지 겸임하는
거진(巨鎭)의 장(將)으로 지방 무관직 이었던 남포?옥구 양진의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시나(國朝人物考), 옥구 절제사 재임시 체임(遞任: 成宗實錄 1488.10.1)되시며 그
후 절도사를 보좌하는 막료로 주진(主鎭)인 절도사영(節度使營)의 2인자가 되는 함길도 도진무(都鎭撫:후에
兵馬虞候로 개칭)가 되심. (平胡公年譜,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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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2년(세조 8년) 10월 3일 : 당상관들을 소임 없이 대우하던 기관인
중추부(中樞府)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내심. (平胡公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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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5년(세조 11년) 12월 25일 : 통정대부(通政大夫)행(行)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내심(國朝人物考平胡公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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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세조 12년) 11월 28일 : 내원(內院:궁궐안)에서 임금의 지휘하에
위장(衛將)이 되어 군사들과 더불어 습진(習陣:군사훈련)을 실시 함. (世祖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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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세조 13년) 2월 25일 : 내원(內院)에서 임금의 지시로 좌위장(左衛將)이
되어 습진 및 전투훈련을 실시 함. (世祖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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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세조 13년) 5월 7일 : 모화관(慕華館) 관문에서 임금의 지시로 중추부
첨지사로서 장수가 되어 전투 훈련을 실시 함.(世祖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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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년(세조 13년) 함경도 길주 지방의 호족출신으로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역임한
이시애(李施愛)가 북도 출신(北道出身)만으로 임명하던 지방 수령들을 세조 임금이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관직(京官職)으로 점차 교체 임명하고 새로운 호패법(戶牌法)을 시행하며
지방민(地方民)의 자유로운 이주를 금하는데 불만을 품고 아우?매부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병마절도사 강효문등 관원 수백을 죽이고 그 세력이 점차 확장되자 세조 임금은 즉시 종실인
구성군 이준을 도총사(都摠師)로,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을 부장으로 삼은 후 1만여 관군을
출전시켜 토벌(討伐)하게 하였으나, 초기 반란군의 세(勢)가 완강하여 관군이 공격을 못하자
5월 22일 임금의 명을 받아 행호군(行護軍) 이형손(李亨孫)과 우의정 홍윤성 등과 더불어
이시애의 반란군 평정대책을 밤새워 의논하고(세조실록), 5월 23일 병조참판 박중선 등과 같이
장군이 되어 황해도(국조인물고는 평안도)군사를 거느리고 증원군(增員軍)으로출전하시어 이시애
토벌전에 선봉장(先鋒將)으로 참전하심. (世祖實錄)
9월 20일 난을 평정하고 개선하신 후 정충출기(精忠出氣)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훈되시어 전라도절도부사(節度副使)가 되시고 연산군(連山君)에 봉군(封君)되심. (世祖實錄)
11월 8일 : 정충출기(精忠出氣) 적개공신(敵愾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행
전라도(全羅道) 절도부사(節度副使) 兼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시면서 가평군(嘉平君)으로
개봉(改封) 되시고 적개공신(敵愾功臣) 상훈교서(賞勳敎書)와 이에 따른 상으로 경호 및 경비와
노비관리 등을 담당하는 병졸인 반당 8인, 노비 10가구, 공신에게 주던 하인으로 관노비에서
파견된 구사 5명, 전 100결(2000석을 수확할 수 있는 전답), 은 25량, 안장과
여인들이 타는 말인 내구마 1필, 의복 1벌 등을 받으심. (世祖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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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교서(賞勳敎書)>
정충출기 적개공신 가선대부행 전라도 절도부사 겸 전주부윤 가평군 이형손에게 왕은 이르노라.
외적을 방어하여 난(亂)을 이기는 것은 신하된 자가 바치는 충절이요, 책훈(策勳)하고 상을
행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임금의 항규(恒規)이다.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요 금세 (今世)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생각컨데 경(卿은) 일찍이 준재가(俊才) 있어서 두 차례의 무과에
급제하였다. 특히 우림(羽林)의 호걸일 뿐만 아니라 또 양리(良吏)의 명성을 나타냈다.
근래 적신 이시애(李施愛)가 감히 불궤(不軌)의 음모를 꾸며서 장수와 수령을 죽이고 드디어
차고 넘치는 악을 부려서 관군에 항거하였다. 이에 내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경이
능히 충의를 분발하여 몸소 사졸(士卒)에 앞장서서 험난을 피하지 않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적당(敵黨)으로 하여금 파죽의 형세에 몰리게 하고 큰 괴수(魁首)가 복부(伏?) 하였다.
그 평정한 공을 갚고 견고한 적을 꺾고 적진을 함락한 공효(功效)를 상 주어야 한다.
이에 경을 책훈 하여서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하고 각을 세워서 얼굴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그 부모와 처자는 작위를 주되 두 계급을 승진하고 적장자(嫡長子)는 대대로
습작(襲爵)하여 그 제도를 잃지 않게 하며 자손을 정안(政案)에 기록하되 적개 이등공신
이형손의 후(后) 라하고 비록 죄를 짓는 일이 있어도 사유(赦宥 : 너그러이 용서함)함이
영세(永世)에 미치도록 하노라.
겸하여 반당 8인과 노비 10구, 구사 5명, 전 100결, 은 25량, 옷 1벌과 안구(말안장),
내구마 1필을 내리고 같은 공신을 아울러 후면에 기록하노라. 내 말 하노니 우익을 두게 된
것은 고인에게 양보하지 않으니 산하를 두고 맹세하여 오늘을 길이 잊지 않겠노라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다 잘 알아주기 바라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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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세조 14년) 11월초에 임금이 충성을 가상히 여겨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에
임명하셨고 11월 7일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사임(辭任)하시고 여막(廬幕:초막)을 치고
상을(喪) 치르심.(平胡公神道碑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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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성종 3년) 2월 1일 노모를 봉양하고자 벼슬을 사임하니 임금이 특별히
배려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 겸 오위(五衛) 중 후위(後衛)였던 충무위(忠武衛)의
상호군(上護軍)에 임명. 노모의 봉양을 편하게 하였다.(成宗實錄,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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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년(성종 5년) 가선대부로 5위 중 우위(右衛)인 호분위의 행 부호군(副護軍)
겸 가마와 말 목장 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장인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에 임명되시어 임금의
경호와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던 정예 기병부대인 겸사복(兼司僕) 소속으로 임금을 은밀히 모시고
경호하면서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점검관리하고 조련시키는 내승(內乘)을 겸임하심. 1월
28일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상(喪)을 치르심. (平胡公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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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성종 8년) 윤2월 26일 내금위장(內禁衛將:임명일 미상) 재임 중 활을
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명궁답게 백발백중하시니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상으로 내리시는
녹피(鹿皮) 한 장을 하사 받으셨으며, 12월 23일 청주목사(淸州牧使) 부임시(임명일 미상)
가지고 간 물건과 수행원이 많았던 것이 재상으로서 법을 받들지 못한 것이라 하여 관리들을 규찰(糾察)하던
현 감사원 격인 사헌부(司憲府)와 잘못된 일들을 임금께 직언 하여 고치게 하던
사간원(司諫院)에서 문초(問招)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하심.
(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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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8년(성종 9년)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내심. (平胡公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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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년(성종 10년) 1월 25일 병조에 반납한 고신(告臣)을 돌려 받음.
(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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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성종 11년) 3월 20일 이조에 반납한 직첩(職牒)을 돌려 받음.
(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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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년(성종 13년) 오위장 겸 오위의 군무를 총괄하던 최고의 군령기관인
오위도총부의 기능을 대표하는 부총관(副摠管)에 이어 훈련원에서 사실상 최고책임자인 도정(都正)
다음 벼슬인 정(正)을 역임하시고 현 국방부 차관급인 병조참판(兵曹參判)을 行하셨으나 임명월일
미상임. (故不得條例)(平胡公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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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년(성종 14년) 10월 가선대부 가평군으로 재 봉군 되심. (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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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년(성종 19년) 10월 1일 무장현감에 하비(임금이 직접 임명)되셨으나
사헌부(司憲府)에서 옥구병마절제사(沃溝兵馬節制使) 재임시(30여년전) 체임(遞任)되었던 일을
들어 수령으로서 적합지 않으니 개차(改差) 하기를 서계(書啓:서면 보고서)로 청하자 임금이
이를 영돈녕(永敦寧) 정1품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토록 지시하였고 의정부에서는 찬반
양론만 격렬할 뿐 결론이 없자 임금이 “쓸만한가를 시험해 보고 그만 두겠다”고
결정하심.(成宗實錄)
10월 15일 : “옥구는 연해의 고을이라 다른 내지(內地)와 비길 바가 아니어서 가평군
이형손(李亨孫)이 체임(遞任)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간 한 사람도 보전한
자가 없다고 하니 인심이 나빠서 그런것인지 수령이 능히 진압하지 못하여 그런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는 승정원(承政院 : 현 대통령비서실)의 보고를 보면, 당시 평호공의
체임(遞任) 원인이 그 고을의 인심이 나쁜데 있었음을 알 수 있음.(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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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년(성종 21년) 5월 26일 평안도 만포진의 첨사(僉使:정3품 당상관)에
임명된 허혼이 압록강 건너 강변에 살고 있는 여진족인 동약사의 처리문제를 임금께 아뢰자 영돈녕
이상과 병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다시 무신인 재상들을 명소(命召)하여 의논하게 하자 평호공께서 여러 무관출신 재상들과 더불어
사목(事目:요즘의 업무처리 규정이나 지시통첩)과 허혼이 품 한 대로하면 되겠다는 의견을 모아
보고하시나 참여한 재상들의 관직은 기록 되어있지 않음. (成宗實錄)
6월 16일 석성현감(石城縣監)에 임명되시고(성종실록), 윤9월 17일 오위도총부 부총관(임명월일
미상)으로 임금이 여주 능침(陵寢) 배알시 수행하시던 중 임금의 지시로 경호. 경비 등에
동원된 군사들의 비에 젖은 상황과 동상에 걸린 자들을 보살펴 치료케 하고 술을 먹이는 등,
사기를 진작 시키셨음. (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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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성종 23년) 6월 19일 전라도내 육군을 통할하던 사령관으로 주진의
장이었던 병마절도사를 제수(除授:임금이 직접 임명)받으시나 의정부 정승들이 나이가 많아(당시
75세) 변장에 적합하지 않으며 위급한 일이 발생해도 사졸들이 심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개정 할
것을 임금께 주청하니 스스로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으심. (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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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성종 23년) 월일미상 서얼(庶孼:첩의 자손)의 인재들을 거두어 쓰고자
창설한 우림위(羽林衛:임금의 경호 및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는 친위부대)의 장과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을 겸하심. (國朝人物考), (平胡公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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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년(성종 24년) 6월 15일 병조판서 한치형 등이 패를 받고 근무중인 수문장을
오위도총부에서 패소하여 모자를 벗기고 땅에 꿇게 한 것은 매우 옳지 않으니 시정토록 해야한다고
아뢰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대신 등에게 의논토록 하였고 이에 따라 평호공(관직명 기록 없음)께서
조정대신들과 같이 “선전표신(宣傳標信)은 지극히 중하므로 가볍게 출납할 수 없고, 수문장의
임무는 가볍지 않으므로 도총부에서도 임의로 진퇴 시킬 수 없습니다. 부득이 기한에 미쳐야 하는
중대한 일이면 임금께 아뢰고서 표신(標信)을 사용하고 그 나머지 긴요하지 않은 일은 체직(遞職)한
후에 불러서 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의논하여 임금께 아뢰었음. (成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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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년(성종24년) 월일 미상 충무위 상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어 내금위장을
지내시고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임한 후에도 계속 녹봉을 받을 수 있는 봉조하(奉朝賀)를
받으심.(國朝人物考, 平胡公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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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6년(연산군 2년) 3월 19일 정충출기 적개 친공신으로 가평군(嘉平君)에
책봉되신 후 가선대부(종2품관)에 오르셨고 중추부의 동지 중추부사로 봉조하(奉朝賀)를 받으신
오위도총부 부총관 겸 훈련원 도정(都正 : 훈련원의 사실상 최고책임자)께서 돌아가시니 향년
79세이시다.
정헌대부(정2품상) 병조판서를 증(贈)하시고 시호(諡號)는 평호(平胡)이시며 사당(祠堂)에서
영원히 신위(神位)를 모시는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명(命)받아 부조묘(不?廟)인 충훈사(忠勳祠
: 충북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祭祀)를 울림. (平胡公年譜) 평호공께서는 61년 간 여섯 임금(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을 섬겨 벼슬을
하셨던 무관으로 무예를 연마하고 학문을 닦아 통달치 않음이 없으셨고 항상 조심하고 삼가 하여
말씀은 온화하되 기상은 삼엄하고 늠름하셨음.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최정예(最精銳) 친위부대로서 무예는 물론 왕의 신임이
각별하여야 하므로 서반(西班)의 집현전으로 평가되었던 내금위(內禁衛) 소속 무관으로 출사하신
이후 왕의 신임과 총애 속에 내금위장 두 번과 우림위장(羽林衛將)을 역임하신
덕장(悳將)이셨고, 무과에 두번 급제한 우림의 호걸로 국가 위기시(危機時)에는 충의로 분발
용맹을 다하여 험난(險難)과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고 사졸에 앞장서서 적을 제압하고 격파하여
나라를 구하고 충성을 다하는 용장이셨으며, 평소에는 정사를 민첩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여 다스리는
곳마다 치적이 있어 보는 이 들이 무관임을 알 수 없었던 양리(良吏)로서 명성을 나타낸 문무를
겸비한 해동(海東)의 100대 명장 중 1인이셨음.
특히 세조 13년에 일어난 이시애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 2등 공신에 책훈 되시면서 부친
다림(多林)께서도 두 계급을 승진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輔祚功臣)에 책훈 되시고
가평군(加平君)에 봉군(封君)되시게 하여 이로부터 우리의 관향(貫鄕)이 조종이씨(朝宗李氏)에서
가평군(加平君)을 중시조(中始祖)로 한 가평이씨(加平李氏)로 바뀌게 하신 분이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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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정부인(貞夫人) 단양 우(禹)씨
생졸(生卒) 년월일 미상
1491년 (성종 22년) 11월 29일 卒
부 우원구(禹元球) 지방 수령인 현령을 지내심.
조부 우홍강(禹洪康) 시호 안정공, 이조참의 참판
증조부 우현보(禹玄寶) 단양부원군, 시호 충정공 고려조 국정을 총괄하던 시중(조선조의 정승급)을
지내심.
고조부 우길생(禹吉生) 적성군. 문하시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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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묘(墓) 연산면 청동리 뒤골 천왕산(天王山) 진좌 술향
배의 묘(墓) 쌍봉(雙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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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子女) 슬하에 3남 1녀를 두셨음.
장남 철근(鐵根) 가성군(嘉城君)
차남 철영(鐵榮) 익산공(益山公)
삼남 철수(鐵壽) 참봉공(參奉公) 슬하에 1남 1녀를 두셨으나 9대손에 이르러절손(絶孫) 됨.
사위 정숙돈(鄭叔墩:奉化人) 숭록대부 우의정을 지내신 정문형의 둘째 아들 사직서령(社稷署令을
지내심.
정부인(貞夫人) 단양우씨(丹陽禹氏)께서는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이며 충신이신 두죽대감 우탁의
후손으로서, 단아한 기품과 온후하고 신중하신 성품으로 명문 사대부가의 큰 집안을 조용하고
화목하게 다스리면서 충과 의를 쫓아 풍운을 가르던 부군에 대한 내조를 다하여 명리(名利)를
이루도록 하셨고 슬하 자녀들의 양육 또한 엄한 법도를 익혀 충효와 우애와 청렴(淸廉)을 몸에
배게 하신 현모양처 이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