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세(世) 철근(鐵根) 1449(세종 31) - 1503(연산군 9)
군호 가성군(嘉城君) 자(字) 불발(不拔)
평호공(平胡公)의 큰아들

1449년(세종 31년) 3월 26일 출생하심. 가성군(嘉城君)께서는 19세가 되시는 1467년 9월 20일 부친이신 평호공께서 정충출기 적개공신 2등에 책훈 되시므로 20세 이상 공신의 자제들을 과거 없이 특채하여 벼슬을 주던 음서(蔭?)에 의거 일찍이 벼슬에 오르셨으나 초기의 기록이 없어 아쉬움.

1478년(성종 9년) 정3품계인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시어 당시 일반 수송선이나 군사용 전함 등을 건조 및 수리하고 재료인 소나무 등도 식목배양 관리하던 전함사(典艦司 : 현 조선소)소속으로 충주에 집결되는 공부(貢賦 : 현 세금으로 나라에서 거두어들인 곡식, 면포, 특산물 등)를 한강을 이용하여 배로써 한양까지 운송하는 일을 관장하던 경기 좌도 수운판관(水運判官)과 황해도의 공부를 배로써 용산까지 운송하는 일을 관장하던 경기우도( 京畿右道)수운판관(水運判官)을 역임하심. (世譜, 墓碣銘)

1484년(성종 15년) 10월 4일 지방수령인 경기도 포천현감(抱川縣監 : 임명연월일 미상) 재임중 임금께서 “한 자급(資級)을 가하되 자궁한자는 대가하라”는 어명을 승정원에 내리심.
※ 당시 관료(현 공무원)의 계급은 최상위계급인 정1품에서 최하위계급인 종9품으로 구분된 9품 제도였다. 1품에서 6품까지는 각 품을 정?종으로 구분하고, 정?종을 다시 상?하(예: 정1품상, 정1품하, 종1품상, 종1품하)로 나뉘어 1개의 품을 4개의 품계로 분류한 24품계였고, 7품에서 9품까지 3개의 품은 정7품, 종7품과 같이 상?하의 구분 없이 2개의 품계로만 분류한 6품계였다. 그리하여 관료의 계급은 세분하면 총 30품계로 분류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자급을 가하라는 것은 한 품계를 승진시키라는 뜻이며 자궁한자는 당하관(정3품하계 이하 종9품까지를 말함)으로 품계가 다 되어 당상관으로만 오를 수 있는 사람을 뜻하며 대가하라는 말은 당사자의 아들, 동생, 사위 중에서 해당자가 있을 경우 대신 승진 시켜주라는 뜻임.
이때 가성군의 품계는 정3품 하계인 통훈대부로 자궁한 자이나 아들, 동생, 사위가 벼슬하기 전이라 대가할 사람이 없었음이 안타까움.

(임명연월일 미상) 한성부(현 서울시청) 산하 관서로 관내의 교량, 도로 관리, 대지측량, 범법사건 처리 및 검시, 분화(불씨 분배), 소방, 이문(里門)의 경계등을 담당하는 5부(五部 : 동. 서. 중. 남. 북부 : 현 구청) 중 동부의 장인 주부(主簿)를 지내심. 동부소속으로 숭신. 창선. 인창 등 현 동격인 12방이 있었음. (世譜,墓碣銘)

(임명연월일 미상) 궁궐에서 임금의 식사 및 궐내 음식물 공급 등의 일을 담당하는 사웅원의 주부(主簿)를 지내심. (世譜 墓碣銘)

1491년(성종 22년) 충주목사의 막료로 공사처리를 보좌하며 사송(詞訟 : 현 민사소송)을 전담하는 충주판관(忠州判官 : 임명연월일 미상) 재임 중 1월에 두만강 변에 살던 해서여진족인 우디거족이 우리나라 국경의 방어 요충지인 조산보에 침입하여, 이들을 토벌하려던 경흥도호부사 겸 병마첨절제사 나사종을 전사하게 하는 등 횡포를 부려 경흥 일대에 큰 피해를 입히니 그 해 4월에 이들을 정벌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대호군(大護軍 : 종3품관)으로 장군이 되어 도원수 허종과 함께 관군 24,000여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시어 10월, 침입한 우디거族을 완전히 소탕하고 파괴된 제진(諸鎭)의 성들을 다시 축성한 후 11월 두만강을 건너 진격하여 우디거족의 본거지를 공격 완전 섬멸시키고 개선하고, 돌아오던 중 11월 29일 모친상을 당하여 모든 관직을 사임하시고 상을 치르심. (成宗實錄, 世譜, 墓碣銘)

1494년(성종 25년) 전라도 진산군수(珍山郡守 : 종4품, 임명월일 미상) 재임시인 7월 14일 사헌부 장령이 “충주판관(종5품)으로 있다가 임기가 차기 전에 초상을 당하였는데 이번에 4품(군수)의 벼슬을 준 것은 너무도 턱없으니 고치기 바랍니다” 하고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마땅히 이조(吏曹)에 물어 보도록 하라고” 하셨으며, 이에 이조에서 “비록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상을 당하여 그만두었으나 일찍이 대호군을 지냈으며 그 위인의 재기가 임무를 감당할 만한 까닭으로 서용(그만둔 관료를 다시 임명하는 것)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음.(成宗實錄)

1496년(연산군 2년) 3월 19일 부친상으로 관직을 사임하시고 상을 치르심.(世譜, 墓碣銘)

1499년(연산군 5년) 황해도 鳳山郡守(임명월일 미상)에 임명되심.(世譜, 墓碣銘)

1503년(연산군 9년) 봉산군수 재임중 병을 얻어 벼슬을 사임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황해도 금교역에서 4월 23일 하세(下世)하시니 향년 55세이심.(世譜, 墓碣銘)
친 공신(親 功臣)이신 평호공의 장자로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행년 30(行年 三十)에 관계가 통훈대부(通訓大夫 : 정3품관)에 이르시어 요직인 경기 수운판관(水運判官), 사웅원 주부를 지내셨으며 당시 함경도 변방에서 우리나라를 괴롭히던 야인들의 본거지를 국경을 넘어 정벌 섬멸하여 변방을 편안케 한 군공(軍功) 또한 크시나 수(壽)가 길지 못하셨으니 애석하다. 큰아들 장생(長生)이 귀(貴)하게 됨으로써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증직(贈職)되시고 가성군(嘉城君)에 봉군(封君)되셨음.

배위 정부인(貞夫人) 전주 최(崔)씨
1450년 (세종 32년) 출생(월일 미상)
1507년 (중종 2년) 윤 1월 20일 졸(卒) 향년 58세
부 최희보(崔希輔)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조부 최수민(崔秀民) 현감(縣監)
증조부 최사학(崔士學) 통훈대부대흥감무(通訓大夫大興監務)
고조부 최유경(崔有慶) 시호: 평도공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 참찬(參贊)의정부사(議政府使:정2품관) (全州崔氏世譜)

공의 묘(墓) 평호공 묘소 좌편 南 100보내 묘(卯)좌

배위 묘(墓) 쌍봉(雙封)

자녀(子女)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음.
장남 장생(長生) 가원군(嘉原君) 파조(派祖)
차남 장경(長卿) 현감공(縣監公) 파조(派祖)
사위 정세신(鄭世臣 : 晉州人) 당시 중앙군에 포함된 양반 특수 병종으로 3품 이상의 고위 양반자손을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부대인 충순위(忠順衛) 소속 무관을 지내심.
사위 정국신(鄭?臣) 참봉(參奉)

정부인 전주 최씨 할머님은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신중, 온후 하시여 가정을 항상 화기애애하게 다스리셨음. 가성군이 돌아가시자 슬픔을 못 이겨 끝내 병을 얻으시고 하세 하시니 부부간 금슬이 남달리 좋으셨음을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