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단종 1년) 출생(出生)하심.
익산공께서는 조부 가평군과 부친 평호공(平胡公)은 물론 백부 장간공(章簡公)과 고모부 위양공(閔發)까지
4분이 무갑과에 급제하신 후 무반의 요직을 두루 거치시며 신흥무반대가로서 위상을 확립해 나가는
가문 융성기에 태어나시고 자라시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힘써 정진하시어 일찍이 소과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진사가 되시고 이어 대과 급제의 큰 뜻을 펴 고저 하셨으나 때를 얻지 못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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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조 부모님은 물론 부모님께 드리는 효성이 지극하셨고 성품 또한 올곧고
청렴하셔서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벼슬에 오르셨으나 초기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음이
아쉬움.(世譜, 司直公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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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6년(연산군 2년) 중훈대부(中訓大夫 : 종3품계) 오르시고 행 성환도 찰방(종
6품관)을 지내심. (平胡公墓碣銘, 世譜)
※ 성환도(成歡道) : 충청도 찰방도(찰방이 관장하는 역로)의 하나로 성환 이외에 신은,
김제, 관정, 일신, 경천, 평천, 주평, 유구, 금사, 장명, 연춘 등 12개의 속역(屬驛)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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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通訓大夫 : 정3품계)에 오르시고 행 전라도 익산군수(益山郡守 : 정4품관)를
지내심.(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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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년(중종 8년) 1월 2일 하세 하시니 향년 61세심.
공께서는 조선초기 적개 친 공신으로 책훈 되시고 재상의 반열에 오르심으로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어 명문사대부가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으신 평호공(平胡公)의 둘째 아들로서 효성이
극진하셨고 성품 또한 온화하면서도 올곧고 청렴하셨으며, 관직에 나가서도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셨고 선정을 베푸시는 명리로 칭송을 들으시어 명문대가의 후손으로서 위상을 높이셨으며
퇴임하신 후에는 취향지(娶鄕地 : 처가에 정착하여 사는것.)인 보은현 어암동으로 낙향
정착하시니 이후 자손들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어 이곳으로부터 번성하여 전국으로 널리 옮겨 살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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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配位) 숙부인(淑夫人) 경주 김(金)씨
생졸(生卒) 년월일 미상 기(忌) 7월 10일
부 김타(김타) 부윤(府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