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世) 다림(多林) 1394(태조 3) - 1468(세조 14)
가평이씨(加平李氏) 중시조(中始祖)
군호(君號) 가평군(加平君)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 침(?)의 아들

1394년(태조 3년) 2월 9일 : 경기도 조종(朝宗 현 加平)에서 출생하심. 타고난 성품이 관대하고 총명하시어 씩씩한 기상과 의기가 높으셨으며 입신양명(立身揚名)의 큰 뜻을 품고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닦으니 가히 따를 자 없어 장래가 매우 촉망되시었음 (가평이씨세보. 묘갈명)

1412년(태종 12년) : 享年 19세에 무갑과(武甲科)에 급제하신 후 40여 년간 해안지방의 자주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고 대마도 징벌(세종 1년)과 북방 변경에 설치된 4郡 6鎭(세종15년-31년)에서 침범하는 여진족 방어에 참여하여 부장(部將) 또는 지휘관으로서 다대한 전공을 세우심.

1451년(문종 원년} 6월 9일 : 군사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6진중의 하나인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의 도호부사겸병마첨절제사(都護府使兼兵馬僉節制使:종3품)로 명을 받으시고 활과 화살을 하사 받으심.
「부령 도호부사 이다림이 사조(辭朝 : 임지로 떠나기 위해 임금께 드리는 인사)하니 임금이 인견(引見 : 가까이 불러 봄)하여 궁시(弓矢 : 활과 화살)를 내리고 말하기를 "함길도의 방수(防戍 : 국경 방어)는 가장 긴절(緊切 : 긴요하고 절실함)하나 정(精 : 치밀하게)하게 훈련되면 어렵지 않다"하니 이다림(李多林)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일찍이 현(縣)이어서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남방의 향호(鄕戶)를 옮겨다가 입거(入居) 시켰으니 토착의 백성과 같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비(武備 : 군사적 대비)에는 화약(火藥)과 습사(習射 : 활쏘기를 익힘)만한 것이 없다 능히 마음을 다 하면 오히려 적을 막을 수 있다. 또 듣건대 호적(戶籍)에서 장정이 많이 빠젔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추쇄(推刷 : 찾아서 잡아들여 군졸로 씀)하면 소요(騷擾) 스러울 수 있다. 내 뜻을 잘 알라" 하였다.(世宗實錄)

1455년(세조원년) 8월19일 : 세조께서 6월에 즉위하신 후 장자 允孫公을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 종2품 : 군사통수권자)로 命하시고, 아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가평군의 마음을 다소라도 위로하시고자 경관직(京官職)인 전농시판사(典農寺判事 : 정3품 : 궁중 제사에 쓸 곡물관리를 담당하는 직위)를 제수 함. (世祖實錄)

1455년(세조원년) 8월21일 : 광주목사(光州牧使) 임기 만료 전에 경관직(京官職)인 전 농시판사(典農寺判事}로 命하였다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이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임금께 아뢰기를 「“광주목사(光州牧使) 이다림(李多林)을 전농시판사로 삼았는데 이는 그 질(秩 : 임기)이 차기도 전에 체임(遞任 : 자리를 바꿔 줌)되었으니 신은 조종(祖宗)의 육기(六期 : 任期年限)의 법(法)이 이로부터 폐지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개정(改正)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께서 전교(傳敎) 하시기를 “이다림(李多林)은 그 이들 이윤손(李允孫)이 서계(西界) 진장(鎭將 : 平安道都節制使)이 되어 나갔음으로 특별히 경관직(京官職)을 제수하여 그 마음을 위로한 것이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지평이 굳이 간청하여도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이 역시 논청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世祖實錄)

1456년(세조 2년) 7월26일 :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시고(世祖實錄) 그 후 가의대부(嘉義大夫 : 종2품상)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 종2품)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오르심. (平胡公李亨孫賞勳敎書 : 父超二階.辛卯譜戊戌譜.墓碣名)

1468년(세조 14년)11월 7일 :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겸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가평군(加平君)께서 향년 75세에 하세 하시니 슬하에 2남6녀(二男六女)를 두셨다. 큰아드님 장간공(章簡公)이 귀히 되시어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로 증직 되시고, 둘째 아드님 평호공(平胡公) 또한 귀히 되시어 純忠積德輔祚功臣을 증하고 가평군(加平君)에 봉군(封君)되는 영광을 얻으시니 이로부터 본관(本貫)이 조종에서 가평이씨로 개관(改貫)되어 가평군을 중시조로 모시게 되었으며 六女 또한 명문 대가로 출가하여 돈독한 사돈관계를 유지하심으로서 당시 신분과 계급이 지배하는 왕권시대에서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하셨음.
配位 여산송씨(礪山宋氏)께서는 두 아들과 여섯 딸을 두셨으니, 장간공은 22세에 서울에서, 평호공은 26세에 연산에서 낳으시어 국가의 동량(棟梁)이 되셨고, 六女는 고이 기르시어 대가로 출가 시키셨으며, 특히 관직으로 가사불고 하신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친정 부근인 이 곳 연산(連山) 청동(靑銅)에 전답을 마련하시어 낙향(64-65세) 하신 후 公의 노후를 보내시도록 하시어 오늘의 가평이씨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음은 탁월한 내조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음.
국가가 위기를 당하였을 때 충절로 목숨을 바칠 수 있고 혼란한 세태 변화 속에서도 굴(屈)하지 않는 후손들이 속출되어 가문의 명예를 빛나게 하셨으니 이 모두가 선조께서 加護하신 덕분이요 충효(忠孝)와 인(仁)과 덕(德)을 중히 여기신 교훈(敎訓)으로서, 우리 후손들은 이를 반드시 지켜야하고 실천하여야 할 가훈(家訓)인 것임.
중시조께서는 조선 개국과 더불어 태어나시고 높은 덕망과 식견을 가지고 으뜸가는가는 무인으로 출발하여 목민관(牧民官)을 거처 재상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시었다.
여산송씨와 더불어 장수하시는 동안 두 분 아드님과 사위가 재상이 되는 영광을 받으시고 후손들에게는 신분계급이 최 상류가 되는 문무 양반의 가문을 만들어 주셨다. 중시조 내외분께서는 우리 가평인의 자랑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께 감사 드리고 종친간 화목하며 형제간 우애로서 저마다 학문에 힘쓰고 생업에 열중하여 조상의 음덕에 보답하여야 할 것임.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
1393년(태조 2년) 8월28일 출생
1474년(성종 5년) 1월 28일 졸 향년(享年) 82세
부   : 송 리(宋 理) 지금주사(知錦州事)
조 부 : 송윤번(宋允蕃) 참판(參判)
증조부 : 송 서(宋 瑞) 우의정(右議政) 여랑부원군(礪良府院君) 정가공(正嘉公)
고조부 : 송 분(宋 ?)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推誠輔理贊化安社功臣) 대광도첨의사사중찬(大匡都僉議司事中贊) 낙랑부원군(樂浪府院君) 양의공(良疑公)

공의 묘(墓) 연산면 청동리 양지편 매산(梅山) 손좌(巽座)

배의 묘(墓) 두마면 왕대리 수회(水回) 임좌(壬座)

자녀(子女) 슬하에 八男妹를 두셨음
장남 : 윤손(允孫) 장간공(章簡公)
차남 : 형손(亨孫) 평호공(平胡公)
사위 : 민 발(閔 發) 여흥인(驪興人) 여산군(驪山君) 시호 위양공(威襄公)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내금위장(內禁衛將) 숭정대부(崇政大夫 : 종1품) 판중 추부사(判中樞府事)
사위 : 최환보(崔?輔) 전주인(全州人) 통사랑(通仕郞 : 정8품)
사위 : 신희렴(申希?) 평산인(平山人) 세마(洗馬 : 世子警護室) 장악원정(掌樂院正 : 정3품)
사위 : 정인형(鄭仁炯) 봉화인(奉化人) 군수(郡守) 군기시부정 : 종3품)
사위 : 김조원(金調元) 상산인(商山人) 사직(司直 : 정5품)
사위 : 배 형(裵 亨) 흥해인(興海人) 판관(判官 : 종5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