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世) 장보(長輔) 1492(성종 23) - 1552(명종 7)
칭호(稱號) 서령공(署令公)
익산공(益山公)의 네째아들

1492년(성종 23년) 보은현(報恩縣)에서 출생하심.
서령공(署令公)은 익산공 슬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셨으나 성품이 방정강의(方正剛毅)하시고 동기간에도 우애가 돈독하여 가까이 이웃들이 보고 크게 깨닫고 본을 받게 하셨고 명문 사대부가의 자손답게 학문에도 정진하시어 학식과 식견이 뛰어나셨음.

대과 급제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공신이요 재상이셨던 평호공의 손자로서 음직(蔭職)으로 출사하시나 초기 벼슬이나 관직등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음.

1512년(중중 27년) 통훈대부(通訓大夫 : 정 3품계)에 오르시어 행 사직서령(社稷署令:종 : 5품관)을 지내심.

1522년 (명종 7년)하세(下世)하시니 향년 61세 셨음.
공은 평호공의 손자로서 가평이문이 무반대가의 신흥 명문임을 조야에 널리 알리셨으며 생거지(生居地)인 충북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에 공을 추모하는 모성제(慕誠齊)가 있음.

배위(配位) 숙인(淑人) 오산이씨(吳山李氏)
生卒 年月日 미상.
부 이수장(李守場)

공의 묘(墓) : 보은군 탄부면 석화리 삼성동 진좌(辰坐)
배의 묘(墓) : 공의 묘 외(外) 백호 묘좌(卯坐)

자녀(子女) : 슬하에 1남을 두심.
장남 직(職) 조산대부(종4품계)로 봉상시첨정(僉正:종4품관)을 지내심.
공의 장남 대창(大昌)께서는 조산대부(종4품계) 행 선공감 주부(종6품관)로 재임중 임진왜란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피난처인 황해도 서흥읍 남면 평리 문악촌에 정 착하시어 세거지로 삼아 후손들이 번창하였으나 이들 또한 8.15 광복 이후 국토 가 분단되어 북한 거주 후손들의 행적을 알 길 없어 매우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