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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성종 23년) 보은현(報恩縣)에서
출생하심.
서령공(署令公)은 익산공 슬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셨으나 성품이 방정강의(方正剛毅)하시고
동기간에도 우애가 돈독하여 가까이 이웃들이 보고 크게 깨닫고 본을 받게 하셨고 명문 사대부가의
자손답게 학문에도 정진하시어 학식과 식견이 뛰어나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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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과 급제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공신이요 재상이셨던 평호공의
손자로서 음직(蔭職)으로 출사하시나 초기 벼슬이나 관직등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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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년(중중 27년) 통훈대부(通訓大夫 : 정 3품계)에
오르시어 행 사직서령(社稷署令:종 : 5품관)을 지내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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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년 (명종 7년)하세(下世)하시니 향년 61세 셨음.
공은 평호공의 손자로서 가평이문이 무반대가의 신흥 명문임을 조야에 널리 알리셨으며 생거지(生居地)인
충북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에 공을 추모하는 모성제(慕誠齊)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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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配位) 숙인(淑人) 오산이씨(吳山李氏)
生卒 年月日 미상.
부 이수장(李守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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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묘(墓) : 보은군 탄부면 석화리 삼성동 진좌(辰坐)
배의 묘(墓) : 공의 묘 외(外) 백호 묘좌(卯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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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子女) : 슬하에 1남을 두심.
장남 직(職) 조산대부(종4품계)로 봉상시첨정(僉正:종4품관)을 지내심.
공의 장남 대창(大昌)께서는 조산대부(종4품계) 행 선공감 주부(종6품관)로 재임중
임진왜란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피난처인 황해도 서흥읍 남면 평리 문악촌에 정 착하시어 세거지로
삼아 후손들이 번창하였으나 이들 또한 8.15 광복 이후 국토 가 분단되어 북한 거주 후손들의
행적을 알 길 없어 매우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