曲江과 西厓 柳成龍
곡강 할아버지는 조선조 중기 예천 용궁 지역에서 출생하셨다.
명종 22년 진사시에 급제하시므로 進士가 되셨는데, 조선의 명필 韓濩(한석봉)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鈞), 조선조 최대의 역모사건의 주역인 정여립(鄭汝立)과는 과거시험 동기이시다. 후일 大科를 보셨더라면 아마도 재상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당시 팽배했던 당쟁의 소용돌이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洛水一曲에 정자를 짓고 覺齋선생 등 知己들과 詩文을 논하며 東江에 배를 띄우고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를 읊게 했으니 그 즐거움이 三公에 비할 바 아니셨으리라.
하루는 朝仕 柳永慶(全州人)이 進士 할아버지를 곡강정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과시 소문대로 이진사의 학문과 경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유영경은 “선생은 초야에 묻혀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出仕의 길에 나설 생각은 없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이에 곡강 할아버지는 “申城浦 萬戶(從四品무관직)를 시켜주면 하겠소.”라고 대답했다.
후일 유영경이 조정에 복귀하여 권신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용궁현 이진사의 비범함과 신성포 만호를 제수하면 宦路에 나올 뜻이 있음을 이야기 했다. 이때 곁에서 듣고 있던 서애 선생이 이르기를 “이 아무개는 나의 隣鄕에 사는 선비인데 신성포는 그분이 평소 소요하던 곳이며, 누구보다 신성포를 사랑한 분이지요. 설사 만호 벼슬을 준다 해도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농으로 한 말입니다.” 역시 서애의 생각이 옳은 것이었다. 유영경은 宣祖 말엽에 領相의 지위에 오르지만 세자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했던 일로 미움을 받아 광해군 즉위 원년, 함경도 경흥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서애 선생은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손가락을 꼽을만큼 훌륭한 명재상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한 임진왜란을 몸소 겪으며 전시 수상으로, 도체찰사로 군국의 무거운 짐을 한 몸에 지고 멸망의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대정치가이며, 퇴계 선생의 도학을 계승한 학자였다.
선생은 임란이 끝날 무렵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河回로 낙향을 하게 된다. 그 후 8년 동안 임진왜란의 성패의 자취를 뒤돌아보며 가감 없는 기록을 남겼으니 징비록(懲毖錄:국보제132호)을 비롯한 방대한 저술이 귀중한 자료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서애는 이 무렵 한 통의 서신을 곡강정 이진사에게 보낸다. 오늘은 서애의 편지 詩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래 원문은 국역 류성룡 시II에 수록된 내용인데, 번역과 감수를 맡은 柳明熙 교수와 부군되시는 安維鎬 선생께서 보낸 것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寄李進士仲陽 問興國寺遺跡 幷序
龍宮大竹里越邊 有古寺 村氓每稱欣谷寺 余偶見鄭圃隱集 有送安東李就書記 詩云
昔日讀書興國寺
時時夜夢到靑山
舊交最憶堂頭老
爲我乘閑一往還
盖欣谷與興國聲相近 故誤稱而人不能辨也 余傷其先賢遺跡 湮沒於百年 李進士仲陽江舍 與相對 故以詩問之
聞道高居對興國
昔賢遺躅問如何
梅花折得無人寄
十里春江漲綠波
진사 이중양에게 서신을 보내어 흥국사 유적에 대해서 묻다. 서문을 병기함
용궁현 대죽리 건너편에 오래된 절이 한 채 있었는데 그곳 향촌 백성들은 저마다 그 절을 흔곡사라고 했다. 나는 우연히 정몽주 선생의 포은집을 보게 되었는데, 문집 속에 <안동으로 부임하는 이취서기를 전송하면서 送安東李就書記>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 시에서 읊기를 :
그 옛날 흥국사에서 공부할 적에는,
종종 밤이면 꿈속에서도 청산에 올랐다네.
옛 친구생각 간절하니 주지스님일세.
날 위해 틈을 내서 한번 다녀가시구려.
라고 한 구절이 있다. 아마도 흔곡과 흥국은 소리가 비슷했던 까닭에, 잘못 말하여 사람들이 분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선현의 유적이 백년이나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 슬펐다.
이중양 진사가 기거하는 강변의 집과는 맞은편에 위치하기에 시를 지어서 그 유적에 대하여 물었다.
듣자하니 귀댁 맞은편이 흥국사라던데,
옛 선현의 유적상황 여쭙건대 어떠하오?
매화가지 꺾어본들 보내서 받을 사람도 없는데
십리에 걸친 봄 강에 푸른 물결 거세졌겠구려.
|